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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명의 창업자는 인텔을 어떻게 바꿨을까"

[서평] 인텔: 끝나지 않은 도전과 혁신

인텔 박물관에서 들었던 ‘South Korea’라는 단어는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씨넷코리아=권봉석 기자) 2000년 여름, 미국 인텔 본사 옆에 있는 인텔 박물관을 찾은 적이 있다. 트랜지스터의 원리와 4004 프로세서 등 인텔의 역사를 설명하던 안내원은 인텔의 DRAM 사업을 소개하다가 “⋯하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일본, 대만, 한국 등 경쟁자가 나타나면서 인텔은 DRAM 사업에서 물러났다”고 설명했다.

재미있는 것은 안내원의 설명이었다. Japan, Taiwan 등 여러 나라 이름을 언급하던 그는 유독 ‘South Korea‘라는 단어에 힘을 실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호의로 보기는 어려웠다. 일행이 한국에서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그는 왜 그런 식으로 이야기했을까.

당시 품었던 의문은 IT 업계를 출입하며 자연스럽게 풀린다. 삼성반도체며 금성반도체(1990년대 말 빅딜로 현대가에 안겼다가 지금은 SK하이닉스가 된)가 축배를 들고 있던 그 순간, 인텔이며 내셔널세미컨덕터 등 무수한 반도체 업체가 벼랑끝에 내몰렸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게 된다.

그러나 인텔은 메모리 반도체를 포기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마이크로프로세서 시장에서 절대 강자가 된다. 인텔 플래시 메모리가 인텔을 먹여 살리는 한 축이 된 것도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인텔: 끝나지 않은 도전과 혁신’(원제 : The Intel Trinity)은 시대를 이어가며 인텔을 이끈 세 명이 변화하는 시대상에 대처하는 모습을 치밀하게 보여준다.

펜티엄 연산오류 사태가 가져다 준 교훈

AMD가 플레이스테이션4와 X박스원에 들어가는 통합형 프로세서와 그래픽칩셋 라데온으로 간신히 발을 붙이고 있고, 인텔 프로세서를 쓰지 않은 컴퓨터 찾기가 더 힘든 요즘이다(심지어 이 글을 쓰는 맥북에어조차도 인텔 프로세서를 썼다). 인텔만큼 승승장구하는 기업을 찾기 어려운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인텔만큼 수많은 시행착오를 되풀이한 기업도 드물 것이다. 인텔이 ‘속도 향상이 성능 향상’이라는 철학 아래 4GHz를 넘어서는 문턱에서 프로세서 출시를 취소하고, 주춤한 틈새를 타 AMD 애슬론64·애슬론XP 프로세서가 약진하며, 기껏 내놓은 듀얼코어 프로세서가 ‘듀얼코어 셀러론’이라는 혹평을 들었던 시절도 있지 않은가.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초대 펜티엄 프로세서의 부동소수점 연산오류도 있다. 1994년 불거진 이 문제는 인텔을 엄청난 궁지에 몰아 넣는다. 주위의 모든 것이 변화했음을 가장 늦게 깨달은 인텔이 치른 엄청난 성장통이다. 결국 당시 CEO인 앤디 그루브는 ‘근본적으로 변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전량 리콜을 실시한다. 이 책은 이처럼 중요한 순간마다 인텔 초창기 창업자가 어떻게 행동했는지 증언한다.

2006년 등장한 코어2듀오 프로세서 이전 몇 년간의 암흑기는 인텔 또한 완벽한 기업이 아니라는 반증이다.

로고송과 버니 피플이 인텔의 전부는 아니다

저자인 마이클 말론은 실리콘 밸리를 오랜동안 취재해 온 전문기자의 경험을 살려 인텔의 초창기 창업자 로버트 노이스, 고든 모어, 앤디 그루브의 행적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나간다. 이 중 중반부 이후 상당 부분은 최근 타계한 앤디 그루브의 성장 과정을 그리는 데 주력했다. 1990년대 후반 월드와이드웹이 등장하고 닷컴 거품이 부풀어 올랐다 꺼진, 한 세대가 지나가는 과정에 그가 있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인사 담당자, 혹은 한 조직을 이끄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내가 원하는 사람을 끌어들이고, 또 어떤 상사가 나쁜 상사인지 벤치마킹하는 차원에서 이 책을 읽어 봐도 흥미로울 듯 하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지만, 단 한 명의 상사 때문에 그야말로 ‘회사를 때려치운’ 여덟 명이 없었다면 지금쯤 우리는 인텔이 아닌 다른 회사 이름을 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역대 인텔 CEO. 왼쪽부터 고든 무어, 크레이그 바렛, 앤디 그루브, 폴 오텔리니.

앤디 그루브(앤드류 S. 그루브)는 지난 3월 타계했다.

무려 세 명의 발자취를 한 권에 담다 보니 분량도 672페이지로 상당히 방대하다. 하지만 내용은 기술적인 이야기가 주가 아니며 어려운 내용에 대한 설명은 없다. IT 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많은 부분을 뛰어 넘길 수 있다.

번역은 평이한 편이지만 전문서적에서 흔히 보이는 고유 명사를 우리말로 풀려다 실패한 사례가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큰 흐름의 이해를 해칠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방대한 분량을 큰 흔들림 없이 우리말로 옮긴 역자의 노고 덕에 피식 웃으며 넘길 수 있을 수준이다. 이런 실수나 오탈자도 다음 개정판에서는 바로 잡히길 기대한다.

초반 로버트 노이스의 생애를 소개하는 과정이 약간 지루하지만 50페이지를 넘어가는 순간부터 기묘한 흡인력에 정신없이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수없이 명멸하는 여러 등장인물 탓에 조금씩 끊어서 읽기 보다는 주말을 투자해 단숨에 읽는 것이 더 잘 읽히는 책이다. 소녀시대와 2NE1, 버니 피플과 로고송으로만 알려진 인텔을 더 자세히 들여다 보고 싶다면 읽어볼 가치가 있다. 디아스포라 간행, 정가 2만 5천원.

‘인텔 인사이드’의 진짜 모습을 알고 싶다면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이다.

권봉석 기자bskwon@c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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